〈썬더볼츠*〉 후기

〈블랙 팬서〉의 흑인 이야기 이후로 정체성 장사에 맛들린 마블은 여성 서사에 동양인, 파키스탄계까지 끌어옵니다.

정체성 장사의 요점은 이겁니다. “(백인 남성과 토큰 여성 조합뿐 아니라) 나랑 비슷한, 내가 속해있는 군을 대표하는 사람들도 슈퍼히어로가 될 수 있구나!” 하고 아이들에게 환상을 심는 거죠. 이런 면에서는 디즈니 프린세스와도 역할을 같이 합니다.

그런데 이번엔 그 정체성이 인종이나 성별이 아니라 정신질환입니다. 게다가 대상이 어린이도 아니고, 오늘날 같은 포용성 넘치는 미디어가 없던 시대에 아픔을 보듬지 못한 채로 커 버려 안쪽이 망가진 채 오늘을 꾸역꾸역 살아가는 어른들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부대끼고 어울리려고도, 자기도 1인분 몫 할 수 있다며 시도도 해 보지만 제대로 되는 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살아봐야 뭘 해낼 수는 있을지 스스로 의심하고, 흑역사만 되새기며 자신감은 땅에 떨어지고 결국 자꾸 죽으려 듭니다. 스스로의 존재 가치와 잠재 능력을 깎아내리며 집어삼켜집니다. 커지게 놔두면 주변 사람에게까지 증세를 전염시킵니다. 독성이 넘칩니다. 그게 자기혐오입니다. 외에도 전반에 걸쳐 정신질환 관련 코드가 노골적으로 깔려있습니다.

자기 혼자 처한 그 싸움을 극복하는 데에는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옐레나가 아빠의 연락이 필요했음을 강조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 모순적이지만 저명한 사실을 담백하게 녹여 문제를 해결합니다. 그렇게 ‘어떤’ 어른들도 무언가를 해낼 수 있다는 걸 보여줍니다. 비슷한 아픔을 겪는 누군가가 손을 뻗어준다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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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브란스: 단절〉 시즌 2

아직 2월이 막 끝났고 3월 막바지에 종영하겠지만 올해의 드라마로 미리 점찍어도 전혀 무리 없을 듯함이 이번 회차로 확실해졌다.

신선한 소재로 끌어낸 이목을 놓치지 않고, 회차마다의 높은 밀도와 텐션으로 진득하게 달려붙도록 하면서도 답변을 하나 풀면 예상치도 못한 질문을 또 주는 식으로 시청자끼리 끊임없이 토론하게 한다. 답답함이 아니라 궁금함과 몰입으로 유도하는 요인인 기본기와 완성도가 치밀하고 탄탄하기에 가능하다.

한 회차 방영마다 인터넷은 달아오르며, 뜨거운 화제를 개월 단위로 이끌어간다. 어느새 우리의 드라마 시청 문화가 잠식한 ‘정주행 문화’로는 마지막으로 그런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TV를 되살렸다”는 평가가 정말이지 맞았다.

올해에 〈기묘한 이야기〉 마지막 시즌이 있는데 그 정도 아니고서야… 이 드라마랑 시상식에서 만날 다른 작품들의 대진운에게 미리 명복을 빌어주고 싶다.

〈2024 올해의 영화〉

올해 첫 관람 영화가 <듄: 파트 2>였다. 그 유명한 용산 아이맥스관에서 영화를 목도하고 나왔다. 마치 놀이공원 어트랙션 하나를 탄 것 같은 정도의 몰입감이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까지 그 여운이 남지는 않았다. 그때 무언가가 빠져 있었는지 최근에야 알았다. 연결과 유대감이었다.

영화와 극장은 ‘이건 얼마나 잘 만들었나’ 하고 잣대를 들이밀고 재단할 작정으로 혼자 심드렁한 표정을 하며 보러 간 곳은 게 아니다. 변한 소리일지 모르지만 그 사실을 되새겨 준 작품들이 올해는 유독 인상 깊게 다가왔다.

<데드풀과 울버린>에서 웨이드가 친구들이 담긴 사진 한 장을 가리키며 “내 세상 전부가 여기에 있다”고 칭하는 순간, 세상을 구한다는 현실감 없는 대의가 지극히 사적인 일로 변모하며 몰입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했을 때, <빅토리>에서 필선과 아빠가 평소에 표현하진 못했지만 서로 아끼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날 때, 그리고 이번 <와일드 로봇>에서 아무리 살벌한 세상이라도 가족을 이루고 공동체를 함께 이끄는 것보다 중요한 임무는 없다는 것을 알려 줄 때. 내가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사실 줄곧 그런 순간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앞으로도 그렇게 남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인사이드 아웃 2>가 극에서 부모님을 제쳐 놓기로 한 선택은 최악의 결정 중 하나였다. 비록 아끼고 재단하라고 있는 게 아니라는 등의 얘기들이 무색해지긴 하지만.)

〈룩백〉

결과물의 형식을 불문하고 책상 앞에 틀어박혀 작업에 매진해야 하는 창작자는,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담아내야 함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방에 갇혀 버려 세상과 멀어지게 된다는 함정에 빠지기 쉽다.

이 만화 기반 영화는 창작자들이 그러지 않기를 바란다. ‘만화를 왜 그려?’ 하는 작중의 질문에 누가 구원자고 피구원자인지 선뜻 단정하기 힘들 만큼 깊은 유대를 나누는 주인공들 간의 관계를 통해 간접적으로 대답한다. 바로 연결이 안겨 주는 의미다.

모든 창작물의 존재 의의는, 느끼는 바가 다를지라도 우리가 같은 것을 보고 향유하고 있다는 유대감을 안겨 줌에 있다. 그런데 정작 만드는 사람들이 그것을 놓쳐서야 되겠는가. 같이 그림을 그리고 보여 줄 수만 있다면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일 것이고, 반대로 더 이상 그럴 수 없다면 온 세상을 잃은 것만 같을 것이다.

창작은 영화에서 비춰진 모습과는 달리 고통으로 가득하다는, 프로 만화가인 원작자도 뻔히 알 터인 사실마저 잠시 제쳐 두고 만화 그리기를 낭만화하면서까지 이 영화는 바람을 전한다. 만들 것이라면, 보여 주기를. 그리고 혼자 되지 말기를.

〈인사이드 아웃 2〉 악플 (ㅈㅅ)

나한테 와닿지 않았던 이유, 하루종일 생각해서 드디어 찾았다. 이번 편에서의 라일리는 안전하다.

건강하신 양친께 부족함 없이 사랑받는 환경 속에서 ‘나는 좋은 사람이야’하고 말하는 자아가 자리잡고 있어도, 누구도 그 신념을 도전하려 들거나 불이익의 결과로 내몰지 않는다. 바보같아 보일 뻔한 친구에게 먼저 동전을 주워주는 선행을 보인다고 다른 무리에게 싸잡혀 너드나 괴짜 집단으로 몰리는 묘사는 없었다. 착하고 좋은 것이 그대로 존재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나의 청소년기는 그렇지 않은 기억들로 많이 차 있다. 비단 나뿐이 아닐 것이라고, 그래서 이쪽을 건드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집을 떠나 삼 일간 친구들이나 선배들과 지냈다면 그 자체로 낯선 환경에서의 위기감이나 공포 조성이 있어야 하는데, 부모를 극에서 퇴장까지 시켜놓고 그런 게 전혀 없는 것도 위화가 심하게 다가왔다. 지난 편에서는 사소한 오해가 쌓여 가출 청소년으로까지 내몰릴 뻔했던 것에 비하면 이번 편의 위험은 그렇게 어둡지도, 와닿지도 않았다. 불안이가 임무를 수행하면서 만들어낸 수많은 가짜 상상 위험들조차 전편의 절정에 해당하는 가출 시도만큼 극적이거나 위협적이지 않았다.

이 두 가지가 엮여있는 것은 바로, 라일리가 이번 영화의 주된 소재로 쓰인 인간관계에 있어 본인이 친구와 선배 중 원하는 쪽을 선택할 수 있는 입장이었다는 것. 사춘기에 들어서며 정말로 도전받고 변화하는 것은 신념과 자아뿐 아니라 그것이 대인관계에 미치는 영향까지 들어간다는 것까지는 이해가 일치하나, 내가 생각하는 진짜 위기는 ‘내가 손을 쓸 수 없는 정도까지 내몰릴 때’일 것이다. 어떤 이유에선지 픽사는 그런 길을 고르지 않았으니 캠프 삼 일간의 행적이 전부 안전하고 진부한 선택으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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