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의 표현과 도움의 의무

교수님께 면담 요청이 왔다. 자기가 봐온 모습과 다르게 지내는 게 걱정되고 안쓰러웠다고 하셨다. 교수님은 기억하고 계셨다. 친구조차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데, 내가 어떤 사람이었고 얼마나 변했는지 교수님은 알고 계셨다.

도움의 동앗줄 격으로 간신히 내려오는 관심의 표현은 그 출처나 거리가 종종 예상치 못했던 정도라 나를 놀라게 한다. 의외로 가까운 주변에서는 잘 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 주변 사람들은 잘못이 없다. 아무에게도 누군가를 도울 의무는 없다.

아무래도 단념이다. 마음의 병을 앓기 시작한 이후 더 이상 교류를 원치 않던 친구들이나, 앞에서는 걱정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정작 내가 힘들 때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는 사람들의 태도는 모순으로 보인다. 하지만 말했듯, 그 사람들마저 잘못도 의무도 없다.

하지만 하다못해 교수님도 먼저 연락을 주셨는데?

아무래도 단념이다.

증언

친목과 아부로 형성되는 파벌, 그리고 정치질. 세력이 생기면 규정을 무시하고 사람 따라 규칙이 정해지는 내로남불. 별 볼 일 없는 놈이 되어 계급과 상관없는 눈치를 받고 있어도 남은 기간 동안 계속 마주하며 지내야 한다는 압박감. 어느 순간 부조리 대신 더 무서운 게 남아있었다. 오염되고 작은 사회가 돌아가는 본모습 그 자체가 바로 그것이다.

내가 밖에서 어떤 것들을 보고 들으며 생각했는지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진다. 호쾌하고 몸 잘 쓰지 않으면 같은 사람으로 봐 주지 않았다. 뻔뻔하게 고개 들고 살기 위해선 얼굴에 엄청 두꺼운 철판을 깔고 사는 수밖에 없었다. 공기와 피가 통하지 않아 속이 썩어문드러져, 내가 원래 어떤 사람이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만큼.

질리도록 계속해서 외치는 이유를 간추리면, 내 목소리에 힘을 실어줄 사람이 없어 무력과 절망을 느낀다는 점에 있다. 기억이라는 가변성 높고 취약한 매체를 기반해 허공에 외치는 절규만이 나를 위한 유일한 증언이다. 같은 기억을 공유한 당사자들의 입을 빌 수 없는 건, 복무기간이 끝나면 서로에게 질릴 대로 질려 인류애를 상실한 채 각자 뿔뿔이 흩어지니 당연한 사실이다. 그런데 그들과는 달리 많은 걸 잊은 채 집으로 돌아온 나를 위해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증언해줄 사람은 어디에 있는가? 나는 누구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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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를 하는 사람에게 보답으로 욕을 했다

위로를 하는 사람에게는 보답으로 욕을 했다. 생각 없이 함부로 낙관적인 전망을 하는 게 괘씸하고 어처구니없었다. 괜히 없는 장점을 억지로 꼬집어 내기보다 내 문제가 뭔지 듣고 싶었다. 사실 이런 식이면 누구도 조언해 주고 싶지 않을 것이다.

어느 때는 밑도 끝도 없이 내가 얼마나 힘이 드는지에 대해 가능한 자주, 최대한 거북하게 일방적으로 퍼부었다. 힘들겠구나 한마디를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러면 아무도 말을 섞으려고 하지조차 않을 것이다.

터놓을 사람이 없어져서 외로우면 언제라도 날 좋게 봐주는 친구 한 명을 찾아가서 하소연을 한다. 그 친구는 내가 모르는 내 좋은 면을 들려주는데, 반대로 나는 거기에 대고 열심히 반박을 한다. 사실 그러면 얘기를 들어 주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는 내가 무슨 말을 듣고 싶어 하는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누군가는 듣고 싶은 말을 해 주기를 계속 기대했다. 그 말도 안 되는 기준에 맞는 사람이 없어서 혼자 외로워한다.

노력은 무조건 뒤통수를 때리고, 기대는 그 뒤통수를 잠시 잊은 때나 하는 것이다. 벌써 뒤통수 맞은 적을 잊은 것 같네.